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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1일 주일 · 성령강림 후 제20주일(Proper 23)

10월 11일 주일 설교 — 마태복음 22:1-14, 예복 없이 들어온 사람

이번 주일의 네 본문은 모두 부름받은 백성이 그 부름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봅니다. 출애굽기 32:1-14은 기다리는 동안 백성이 신을 만들어 버린 자리와 모세의 중보를 보여 주고, 시편 106:19-23은 그 일을 공동체의 고백으로 되읊으며, 빌립보서 4:1-9은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사실 위에서 생각을 지키라고 권합니다. 마태복음 22:1-14은 그 물음을 가장 날카롭게 세우기에 초점으로 잡았습니다. 왕이 차린 잔치에 아무나 들어왔는데도 끝에 한 사람이 쫓겨나기 때문이며, 이 본문은 설교자에게 은혜와 책임 둘 중 하나로 도망가지 말 것을 조용히 요구합니다. 참고로 이 네 본문은 개정 공동 성서일과(RCL)의 배열이고, 성서일과를 쓰지 않는 교단과 교회가 많으니 그대로 따르실 것인지는 목사님의 판단에 있습니다.

이 주일의 본문

개정공통성서일과(RCL) 가해 Track 1 기준 · 본문은 참고용입니다 — 소속 교단의 일정이나 연속 강해가 있으면 그대로 가시면 됩니다.

중심 본문 한눈에 — 마태복음 22:1-14

  1. 1-3절에서 임금이 아들의 혼인을 위해 잔치를 차리고 종을 보내지만, 청함받은 이들은 오려 하지 않습니다.
  2. 4-6절에서 두 번째 종들이 상이 다 준비되었다고 알리는데, 어떤 이는 밭으로 어떤 이는 사업하러 가고, 남은 이들은 종들을 붙잡아 죽입니다.
  3. 7절에서 임금이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동네를 불사르는, 비유치고는 지나치게 사나운 한 문장이 끼어듭니다.
  4. 8-10절에서 종들은 길거리로 나가 만나는 대로 데려오고,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섞인 채 혼인 자리가 찹니다.
  5. 11-14절에서 임금이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친구여라 부르며 묻는데,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결박되어 바깥으로 쫓겨나며, 비유는 청함과 택함을 가르는 14절로 닫힙니다.

설교가 갈 수 있는 세 길

거절은 악한 얼굴로 오지 않습니다

2-6절에서 초청을 뿌리친 이들이 댄 이유는 밭과 사업, 곧 흠잡을 데 없는 일상입니다. 이 길로 가면 회중은 자기 토요일 밤과 주일 아침을 떠올리게 되고, 설교는 설명 없이 가까워집니다. 값을 치러야 하는 곳은 분명합니다. 일상 자체를 죄로 몰면 생업을 지고 사는 성도를 강단에서 꾸짖는 설교가 되고, 본문이 겨눈 것은 밭이 아니라 왕의 초청을 가벼운 것으로 셈한 판단이라는 사실이 흐려집니다.

거리에서 데려온 선악이 섞인 무리

8-10절은 종들이 길에서 만나는 대로 데려와 자리를 채우는 장면이고, 교회의 문턱과 명부가 자연스럽게 설교의 자리가 됩니다. 들어온 사람들의 자격을 본문이 전혀 묻지 않는다는 점이 이 각도의 힘입니다. 값은 여기서 멈출 때 생깁니다. 10절에서 끝내면 11절 이후가 군더더기처럼 들리고, 정작 마태가 이 비유를 배치한 이유를 설교가 피해 간 셈이 됩니다.

예복, 그리고 14절

11-14절을 본문의 결론으로 삼는 길입니다. 아무나 들어온 자리에도 응답의 형태가 있다는 긴장은 설교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마태가 세워 둔 것입니다. 값은 예복이 무엇인지 지정하는 순간 치러집니다. 세례로 볼 것인지, 전가된 의로 볼 것인지, 성화의 열매로 볼 것인지는 교단이 갈리는 자리이고, 어느 전통의 언어를 쓰고 있는지 밝히지 않으면 성도는 그 설명을 본문 자체의 말로 듣습니다.

이 본문에서 흔히 미끄러지는 자리

비유를 알레고리 사전으로 바꾸는 일

임금은 하나님, 아들은 그리스도, 종은 선지자, 불사른 동네는 주후 70년의 예루살렘으로 한 칸씩 채우고 나면 설교는 역사 강의가 되고 회중은 자기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7절을 한 민족의 거절로 못 박는 문장은 의도와 무관하게 반유대적으로 울립니다. 7절을 다루지 않는 것도 한 선택이지만, 다루기로 하셨다면 그 문장을 미리 적어 두고 소리 내어 읽어 보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예복을 설교자가 대신 정해 버리는 일

본문은 예복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왕의 질문에 그 사람이 침묵했다는 사실만 남깁니다. 한쪽 교리로 단정해 버리면 성도는 자기 구원을 재는 점검표를 받아 들고 돌아가고, 설교는 본문보다 교리를 다룬 것이 됩니다. 종말과 심판에 관한 전통의 차이도 여기서 함께 걸리니, 말할 수 있는 것과 본문이 열어 둔 것을 설교 안에서 구분해 두시는 편이 낫습니다.

누가복음의 큰 잔치 비유와 섞는 일

비슷한 비유가 누가복음 14장에도 있어 두 본문의 기억이 자연히 겹치는데, 섞어 설교하면 마태의 날카로운 끝인 11-14절이 사라지고 넉넉한 초청 이야기만 남습니다. 12절의 친구여라는 호칭과 그 사람의 침묵을 건너뛰고 곧장 적용으로 가는 것도 같은 미끄러짐입니다. 마태의 끝이 불편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피하게 되는 자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최근 연구가 이 본문에서 짚은 것

아래는 이 본문들을 다룬 최근(2023년 이후) 학술 논문 가운데, 설교자가 본문을 읽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만 골랐습니다. 논문의 서지 정보는 OpenAlex·Crossref 에서 가져와 DOI 로 존재를 확인한 것이고, 요약은 논문 초록만 읽고 풀어 쓴 것입니다.

  • Fred F. Antonio (2024). The Significance of Food in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in Matthew 22:1-14 and the Kanyaw. Religion and Social Communication. 논문 보기

    마태복음 22:1-14

    이 논문은 마태복음 22:1-14의 혼인 잔치 비유를 이고로트 사람들의 카냐우 축제와 나란히 놓고, 초청, 잔치, 음식의 준비, 초청받은 이들의 반응, 그 모임의 사회적 함의를 다섯 주제로 짚습니다. 초록에 따르면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나누는 일이 이 비유에서 주변 장식이 아니라 중심에 놓입니다.

    설교자께 던지는 물음 — 이 비유에서 왕이 차린 상과 음식은 하늘 잔치를 가리키는 배경 그림일 뿐인지, 아니면 본문이 말하려는 것 자체가 함께 먹는 일에 실려 있는지요?

  • David J. Zucker (2024). Exodus 32:7-14. God to Moses, “your people.” Moses to God, “(No) Your people.”: Explanations Across the Ages. Biblical Theology Bulletin Journal of Bible and Culture. 논문 보기

    출애굽기 32:1-14

    이 논문은 출애굽기 32:7-14에서 하나님과 모세가 이스라엘을 두고 네 백성이라고 서로 돌려 말하는 대화를, 다시 쓴 성경과 랍비 문헌과 미드라시, 교부, 타르굼, 유대 전통 주석가, 종교개혁기 이후의 기독교 주석가와 현대 학자에 이르는 해석 표본으로 모아 견줍니다. 초록에 따르면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이천 년이 넘도록 되풀이해 물어 온 문제입니다.

    설교자께 던지는 물음 — 모세의 중보는 하나님의 뜻을 꺾어 돌이킨 일로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네 백성이라 부르시며 이미 열어 두신 자리로 읽어야 하는지요?

  • Andrew R. Davis (2025). Notes on Biblical Mercy: God’s Womb-Like Love. Irish Theological Quarterly. 논문 보기

    출애굽기 32:1-14

    이 논문은 히브리 성경의 라하밈이 태의 이미지에서 온 말임을 자세히 밝히고 이를 헤세드와 구별한 뒤, 금송아지 사건 이후의 출애굽기 32-34장을 하나님의 긍휼이 깨어진 언약 관계를 화해시키고 회복하는 힘의 보기로 읽습니다. 초록에 따르면 이 분석은 긍휼에 관한 기독교 신학을 넓히려는 시도입니다.

    설교자께 던지는 물음 — 32:14에서 하나님이 돌이키신 것을 진노를 참아 누르신 일로 말할 것인지, 어머니의 태와 같은 긍휼이 먼저 움직인 일로 말할 것인지요?

  • Jae Woog Bae (2023). Understanding for Freedom in Philippians 4:4-6. 신약논단. 논문 보기

    빌립보서 4:1-9

    이 논문은 빌립보서 4:4-6의 기쁨과 관용과 감사를 자유를 가리키는 말로 읽고, 특히 5절의 관용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맞물려 있으며 7절의 평화도 그 종말론적 지평 안에서 성도의 생각을 지키는 힘으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초록에 따르면 이 단락의 그리스도 중심적 진술에서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를 읽어 내려 합니다.

    설교자께 던지는 물음 — 4:5의 관용을 성품이나 처세의 문제로 말할 것인지,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사실에서 비로소 나오는 태도로 말할 것인지요?

초록을 풀어 쓴 것이라 논문의 논증 전체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설교에 쓰시기 전에 논문 원문을 직접 읽어 주십시오. 논문이 말하는 것과 이 페이지가 던지는 물음은 구별해서 읽으십시오. 학술지의 등급이나 동료 심사의 엄격함은 따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 본문과의 관련성으로만 골랐습니다.

설교하신 뒤 녹음으로 확인할 다섯 가지

  1. 11-14절에 실제로 몇 분을 쓰셨는지요. 녹음에서 예복이 처음 언급된 시점을 찍어, 설교 전체 길이의 몇 할쯤 되는 자리였는지 보십니다.
  2. 예복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요. 그 말이 설교 안에서 몇 번 나왔고, 나올 때마다 같은 뜻으로 쓰였는지 녹음에서 세어 보십니다.
  3. 7절의 불사름을 언급하셨는지요. 언급하셨다면 그것을 특정 민족이나 특정 역사 사건으로 못 박는 문장이 몇 번 나왔는지 그대로 적어 보십니다.
  4. 초청과 환대를 말한 시간과 책임과 심판을 말한 시간이 각각 얼마였는지요. 녹음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눠 재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가 숫자로 남습니다.
  5. 적용 대목에서 회중 한 사람이 다음 주일 전에 실제로 할 수 있는 동작이 지정된 문장이 몇 개였는지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방향만 제시한 문장과 따로 세어 보십니다.

적용이 붕 뜨지 않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방향이고,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하라는 말은 동작입니다. 방향만 받은 회중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며, 본인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이 본문은 마침 종들에게 길로 나가 데려오라는 동작을 명령으로 주었으니, 적용도 동작으로 내려놓을 수 있는 드문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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