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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1월 29일 주일 · 대림절 첫째 주일

11월 29일 대림절 첫째 주일 설교 — 마가복음 13:24-37, 그 날을 모른 채 깨어 있기

성서일과(RCL)가 이 주일에 묶어 둔 네 본문은 모두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향해 서 있는 자리」를 다룹니다. 이사야 64:1-9은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기를 구하는 탄원이고, 시편 80편은 얼굴을 비추어 달라는 반복된 간구이며, 고린도전서 1:3-9은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교회를 향한 감사이고, 마가복음 13:24-37은 그 기다림에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붙입니다. 성서일과를 따르지 않는 교단에 계시다면 이 묶음은 참고로만 보시고, 네 본문 가운데 하나만 쓰셔도 되고 전혀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서는 복음서를 중심으로 잡았습니다 — 대림절 첫째 주일이 성탄의 준비가 아니라 재림의 기다림에서 출발하는 까닭이 이 본문에 가장 또렷하고, 「모른다」와 「깨어 있으라」가 한 단락에 붙어 있다는 점이 설교자에게 가장 까다로운 요구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설교자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먼저 고백하게 만듭니다.

이 주일의 본문

개정공통성서일과(RCL) 나해 Track 1 기준 · 본문은 참고용입니다 — 소속 교단의 일정이나 연속 강해가 있으면 그대로 가시면 됩니다.

중심 본문 한눈에 — 마가복음 13:24-37

  1. 24-25절은 환난 후에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구약 예언서의 심판 언어를 그대로 끌어온 대목이라, 천체 현상의 묘사인지 권세의 붕괴를 가리키는 상징인지가 여기서 이미 갈립니다.
  2. 26-27절에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고 천사들을 보내어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십니다. 본문의 무게중심은 파괴가 아니라 모으심에 있습니다.
  3. 28-31절은 무화과나무 비유로 방향을 바꿉니다. 잎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이런 일」을 보면 가까운 줄 알라고 하시고, 31절에서 천지는 없어지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못을 박으십니다. 30절의 「이 세대」가 누구를 가리키는지가 이 단락의 가장 오래된 논쟁입니다.
  4. 32절에서 어조가 뒤집힙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십니다. 징조를 읽으라는 말 바로 뒤에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붙어 있는 이 긴장이 본문의 심장입니다.
  5. 34-37절은 집을 떠나며 종들에게 각각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한 주인의 비유로 닫힙니다. 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 네 시각을 세시고, 마지막 37절에서 그 명령을 모든 사람에게 넓히십니다.

설교가 갈 수 있는 세 길

모른다는 것이 깨어 있음의 근거

32절을 설교의 중심에 두고, 시기를 계산하려는 모든 시도가 본문 자체에 의해 막혀 있음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깨어 있음은 날짜를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맡은 일을 계속하는 일이 되고, 종말론의 여러 입장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든 설교가 설 수 있습니다. 대가는 긴장감입니다 — 「모른다」를 강조하다 보면 24-27절의 장면이 밋밋해지고, 회중이 오실 분을 실제로 기다리는 마음 없이 성실만 권고받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는 오심

27절의 모으심을 본문의 목적으로 읽고, 이사야 64:1의 탄원과 시편 80편의 간구가 이 모으심에서 응답된다고 보는 길입니다. 재림을 위협이 아니라 흩어짐의 끝으로 설교할 수 있고, 외국에 있는 자녀나 떠난 성도를 생각하는 회중에게 본문이 곧바로 닿습니다. 대가는 심판의 절반이 조용해지는 것입니다 — 24-25절의 흔들림을 배경 장식으로만 쓰면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맡겨진 일과 문지기의 자리

34절에 기대어, 깨어 있음이 각자에게 이미 주어진 일의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문지기 하나가 아니라 종들 각각에게 일이 맡겨졌다는 점이 교회 안의 직분과 봉사를 추상적인 권면 없이 다룰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대가는 설교가 교회 봉사 독려로 좁아질 위험입니다 — 비유의 주인은 돌아오시는 분이지 일감을 나눠 주고 사라진 고용주가 아니라는 점을 놓치면 본문이 종말론을 잃습니다.

이 본문에서 흔히 미끄러지는 자리

시대 진단으로 징조를 메우기

「이런 일」의 자리에 전쟁과 재난과 기후 이야기를 채워 넣으면 설교가 금방 뜨거워지지만, 그것은 32절이 막아 둔 길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징조를 해독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해독할 수 없다는 사실 위에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오늘의 사건을 예로 드시더라도 그것이 날짜의 근거가 아니라는 말을 같은 호흡에 붙이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30절을 설교 중에 슬쩍 지나가기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는 주석사에서 가장 오래 다퉈 온 구절이고, 성경을 읽는 성도 가운데 이 대목에서 걸려 본 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설교자가 아무 말 없이 넘어가면 그 성도는 질문을 혼자 들고 돌아갑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시든, 다른 읽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강단에서 한 문장으로 인정하실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음을 두려움으로 만들기

도둑처럼 오신다는 다른 본문의 긴장을 이 비유에 겹쳐 놓으면, 주인이 돌아와 자는 종을 적발하는 장면으로 설교가 기울기 쉽습니다. 그러면 적용이 「졸지 마십시오」가 되고, 회중은 이미 지쳐 있는 자리에서 한 번 더 조여집니다. 36절의 경고는 사실이지만, 비유의 주인이 종들에게 권한을 맡기고 떠난 분이라는 34절을 함께 읽으면 어조가 달라집니다.

최근 연구가 이 본문에서 짚은 것

아래는 이 본문들을 다룬 최근(2023년 이후) 학술 논문 가운데, 설교자가 본문을 읽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만 골랐습니다. 논문의 서지 정보는 OpenAlex·Crossref 에서 가져와 DOI 로 존재를 확인한 것이고, 요약은 논문 초록만 읽고 풀어 쓴 것입니다.

  • Marius Nel (2023). The question of Mark 13 as an apocalypse. Verbum et Ecclesia. 논문 보기

    마가복음 13:24-37

    이 논문은 마가복음 13장을 묵시 문헌의 여러 특징을 의도적으로 띤 본문으로 보되, 그 기능은 임박한 종말 기대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히는 쪽이라고 봅니다. 초록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위기 상황 속에서 마가의 예수는 그 고난이 곧 종말의 표지는 아니며 때는 아들도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신자들이 언제가 아니라 누구를 기다리는지에 서게 한다고 정리합니다.

    설교자께 던지는 물음 — 이 설교가 회중의 종말 기대에 불을 붙이는 쪽인지 가라앉히는 쪽인지, 본문이 그 가운데 어느 일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 Elton L. Hollon (2023). Unsound and Informally Fallacious Preterist Arguments for Mark 13:24‐27. The Heythrop Journal. 논문 보기

    마가복음 13:24-37

    이 논문은 마가복음 13:24-27을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읽는 과거주의적 해석이 흔히 의지하는 두 가지 논증, 이른바 시간 표현 논증을 따져 봅니다. 초록에 따르면 첫째 논증은 근거가 성립하지 않고 둘째 논증은 선택지를 둘로만 좁히는 오류를 범하므로, 그 해석보다 미래주의적 읽기가 더 그럴듯하다고 주장합니다.

    설교자께 던지는 물음 — 24-27절의 시간 표현을 강단에서 어느 쪽으로 읽으시든, 그 읽기를 택한 근거를 회중에게 한 문장으로 설명하실 수 있겠는지요.

  • Hyun Jung Oh (2024). The Future Bodily Resurrection Implied in Paul’s Eschatological Language in 1 Corinthians 1-4. 신약논단. 논문 보기

    고린도전서 1:3-9

    이 논문은 고린도전서 1-4장의 교회 연합 권면 안에 바울의 미래 몸의 부활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고 봅니다. 초록에 따르면 기다리는 사람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날과 보상과 수고 같은 종말론적 표현들이 15장의 부활 주제와 개념적으로 이어져 있어, 하나 되라는 권면이 종말 기다림에 뿌리를 둔 윤리로 읽힌다고 정리합니다.

    설교자께 던지는 물음 — 고린도전서 1:7-8의 기다림을 대림절 서두에 함께 읽는다면, 재림을 기다리는 일과 교회가 한 마음이 되는 일이 어떻게 한 뿌리에서 나온다고 말하실 수 있겠는지요.

초록을 풀어 쓴 것이라 논문의 논증 전체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설교에 쓰시기 전에 논문 원문을 직접 읽어 주십시오. 논문이 말하는 것과 이 페이지가 던지는 물음은 구별해서 읽으십시오. 학술지의 등급이나 동료 심사의 엄격함은 따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 본문과의 관련성으로만 골랐습니다.

설교하신 뒤 녹음으로 확인할 다섯 가지

  1. 32절의 「아버지만 아신다」를 설교 중에 실제로 읽거나 언급하셨는지요. 몇 번 나왔고, 도입부였는지 결론부였는지 녹음에서 위치를 확인해 보십시오.
  2. 오늘의 사건이나 세태를 징조로 언급한 대목이 몇 번이었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이것이 날짜의 근거는 아니다」는 단서를 붙인 것이 몇 번이었는지 세어 보십시오.
  3. 27절의 모으심을 한 문장이라도 설교하셨는지요. 24-25절의 흔들림에 쓴 시간과 27절에 쓴 시간을 녹음에서 재어 비교해 보십시오.
  4. 30절의 「이 세대」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셨는지요. 하지 않으셨다면, 설교 전체에서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은 적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십시오.
  5. 결론에서 회중이 이번 주에 할 수 있는 행동이 말로 나왔는지요. 녹음을 들으며 그 문장을 그대로 적어 보시고, 적을 문장이 없다면 적용이 방향 제시에 그친 것입니다.

적용이 붕 뜨지 않게

「깨어 있으십시오」는 방향이지 행동이 아닙니다. 회중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화요일 아침에 무엇을 해야 깨어 있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 채 돌아갑니다. 이 본문은 적용의 재료를 스스로 내어 줍니다 — 34절은 각 사람에게 이미 일이 맡겨져 있다고 하고, 35절은 깨어 있는 시간을 네 토막으로 나누어 셉니다. 다음 주일 전에 끝낼 수 있는 크기로 잘라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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