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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50:15-21

창세기 50장 설교 — 당신들은 악을 꾀했으나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본문은 요셉 이야기 전체가 도착하는 자리이고, 창세기 50:20 한 절은 섭리와 용서를 말할 때 강단에서 가장 자주 불려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20절 하나로 요약되기에는 훨씬 어색하고 무겁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형들은 두려움에 떨고, 요셉은 형들이 말을 전해 오자 울고, 화해는 이미 17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설교자는 이 본문에서 섭리의 교리를 말하는 동시에, 그 교리가 실제 상처 앞에서 어떻게 발음되는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Preaching Lab은 설교 녹음으로 그 발음이 어떻게 들렸는지를 함께 살피는 자리입니다.

본문 한눈에

  1. 야곱이 죽자 형들은 요셉이 이제야 갚으려 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용서를 청하는 말을 전합니다(15-17절).
  2. 요셉은 그 말을 듣고 웁니다. 45장에서 이미 화해했다고 여겼던 자리가 아직 형들 쪽에서는 닫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17절).
  3. 형들이 직접 와서 종이 되겠다고 엎드리자, 요셉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며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되묻습니다(18-19절).
  4. 그리고 형들의 악한 의도와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고, 그 결과가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20절).
  5. 요셉은 형들과 그 자녀들을 기르겠다고 약속하고 위로하여 마음을 안심시킵니다. 본문은 처벌이 아니라 부양의 약속으로 닫힙니다(21절).

설교가 갈 수 있는 길 셋

섭리 — 악한 의도 위에 놓인 하나님의 의도

20절을 중심으로,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계획이 같은 사건 안에서 어떻게 함께 있는지를 다루는 방향입니다. 형들의 악은 악으로 남아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선을 이루셨다는 긴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방향은 하나님이 악을 원하셨다는 말로 미끄러지기 쉬우므로, 섭리를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서 멈출지를 설교자가 미리 정해 두어야 합니다. 예정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이해는 교단마다 다르니, 본문이 말하는 데까지만 가고 그 너머는 각 전통의 자리로 남겨 두는 것이 맞습니다.

용서 —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

19절의 되물음이 중심이 됩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근거는 형들이 충분히 뉘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의 자리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었습니다. 이 방향은 용서를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의 문제로 옮겨 놓기 때문에, 회중 가운데 아직 용서하지 못한 분들에게 실제로 잡을 것을 줍니다. 다만 용서가 곧 관계 회복이나 신뢰의 회복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 두지 않으면, 상처 입은 성도에게 무리한 요구가 됩니다.

두려움 — 용서받았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형들

설교의 초점을 요셉이 아니라 형들에게 두는 방향입니다. 17년을 받아 먹고 살았으면서도 아버지가 죽자 두려움이 되살아나는 형들의 모습은, 은혜를 받고도 은혜를 믿지 못하는 성도의 모습과 겹칩니다. 이 방향은 복음을 매우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는 길을 열지만, 형들의 두려움을 우스운 것으로 그리면 회중은 자기를 거기서 못 찾습니다. 요셉이 운 것은 형들의 두려움을 무겁게 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설교자도 같은 무게로 다루어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흔히 어긋나는 자리

20절만 떼어 내고 15-19절을 건너뛰는 것

이 본문에서 가장 흔한 미끄러짐은 20절을 표어처럼 세우고 나머지를 배경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들의 두려움과 요셉의 눈물, 그리고 19절의 되물음이 빠지고, 섭리가 사건의 무게 없이 명제로만 남습니다. 20절은 17절의 울음과 19절의 질문을 거쳐서 도착하는 문장이지, 그 앞에 있는 문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셨으니 악도 괜찮았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

20절을 설교하다 보면 형들의 죄가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다는 쪽으로 무게가 옮겨 갑니다. 그러나 본문은 형들의 의도를 끝까지 악이라고 부르고, 요셉은 그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그 고난이 결국 좋은 것이었다고 미리 말해 버리면, 본문이 아니라 설교자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됩니다.

요셉을 용서의 모범으로만 세우고 그리스도까지 가지 않는 것

요셉의 용서를 회중이 따라야 할 본보기로만 제시하면 설교는 도덕 강연이 되고, 용서하지 못하는 성도에게는 또 하나의 짐이 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한 일은 우리를 향해 먼저 이루어진 일의 그림자입니다. 이 본문에서 십자가로 가는 길은 억지가 아니지만, 그 길을 실제로 걸었는지 아니면 결론에서 한 문장으로 붙였는지는 녹음을 들어 보면 드러납니다.

설교하신 뒤 스스로 물을 다섯 가지

  1. 17절에서 요셉이 울었다는 사실을 설교에서 언급하셨는지요. 언급하셨다면 그 눈물을 무엇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는지, 아니면 사실만 읽고 지나가셨는지 녹취에서 확인해 보십시오.
  2. 19절의 되물음, 곧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는 말을 설교 안에서 몇 번 다루셨고, 20절보다 앞에 두셨는지 뒤에 두셨는지 살펴보십시오.
  3. 형들의 행위를 가리킬 때 악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셨는지, 아니면 실수나 잘못 같은 더 부드러운 말로 바꾸셨는지 녹취에서 그 낱말들을 세어 보십시오.
  4. 용서와 관계 회복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구분을 한 문장이라도 하셨는지요. 하셨다면 어느 대목에서였고, 안 하셨다면 회중 가운데 학대나 배신을 겪은 분이 그 설교를 어떻게 들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5. 예화 가운데 본문의 요셉보다 더 길게 말한 인물이 있었는지요. 예화에 쓴 시간과 15-21절을 직접 다룬 시간을 녹음에서 재어 비교해 보십시오.

적용이 붕 뜨지 않게

이 본문의 적용은 용서하라는 방향으로 끝나기가 가장 쉽고, 그렇게 끝나면 성도는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돌아갑니다. 착지한 적용은 요셉이 실제로 한 일, 곧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위로하고 부양을 약속한 그 행동 가운데 하나를 골라, 다음 주일 전에 할 수 있는 크기로 줄여 주는 것입니다. 용서를 완성하라고 요구하지 말고, 심판의 자리에서 한 걸음 내려오는 행동 하나를 제안하는 것이 본문에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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