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21-35
마태복음 18장 설교 —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의 백 데나리온
이 본문은 용서를 주제로 설교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자리이면서, 마지막 35절 때문에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질문에서 시작해 임금의 심판으로 끝나는 이 비유는 설교자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합니다. 탕감의 크기를 회중이 실감하게 만드는 일과, 형제를 향한 실제 용서가 어떤 모습인지 흐리지 않고 말하는 일입니다. Preaching Lab은 설교하신 뒤 녹음을 놓고 이 두 가지가 실제로 강단에서 들렸는지 함께 살피는 자리입니다.
본문 한눈에
-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고, 예수님은 셈이 무의미해지는 숫자로 답하십니다(21-22절).
- 비유는 임금이 종들과 결산하는 장면으로 열리고, 한 종이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채 끌려옵니다(23-25절).
- 종이 갚겠다고 애원하자 임금은 기한을 늘려 주는 대신 빚 자체를 없애 주는데, 이것이 비유의 무게중심입니다(26-27절).
-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를 붙들고 목을 조르며, 동료가 똑같은 말로 애원해도 옥에 가둡니다(28-30절).
- 동료들의 마음 아픔이 임금에게 전해지고, 임금은 그를 다시 불러 책망한 뒤 옥리에게 넘기며, 예수님은 이것을 아버지의 대우와 연결하십니다(31-35절).
설교가 갈 수 있는 길 셋
탕감의 크기에서 시작하는 설교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격차를 회중이 몸으로 느끼게 하는 데 설교의 앞부분을 씁니다. 용서하라는 명령보다 먼저 받은 용서를 크게 보여 주는 길입니다. 이 방향은 27절이 설교의 절정이 되어야 하므로, 뒷부분의 심판이 앞부분의 은혜를 덮지 않도록 분량을 배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따라가는 설교
21절의 질문 자체를 문제로 삼습니다. 횟수를 세는 마음, 용서를 하나의 의무로 계산하는 마음이 비유 속 종의 마음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방향은 용서의 정의를 새로 세우는 일이라, 상처가 아직 생생한 성도에게 용서가 곧 관계 회복이나 화해의 강요로 들리지 않도록 경계를 분명히 그어야 합니다.
형제들 가운데서 읽는 설교
이 비유가 18장 전체, 곧 실족하게 하는 자와 잃은 양과 범죄한 형제를 다루는 교회 공동체 맥락 안에 놓여 있음을 살립니다. 용서를 개인의 내면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삶의 방식으로 세우는 길입니다. 이 방향은 31절의 동료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해야 하고, 실제 교회 안의 갈등을 염두에 두고 말하게 되므로 특정 사람이 떠오르지 않도록 표현을 다듬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본문에서 흔히 어긋나는 자리
27절을 지나쳐 28절로 달려가는 설교
설교의 관심이 용서하지 않은 종의 잘못에 쏠리면, 임금의 탕감이 비유의 배경 설명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면 회중은 용서하라는 명령만 듣고 돌아가고, 왜 용서할 수 있는지는 듣지 못합니다. 27절에 얼마나 머무셨는지가 이 설교의 무게를 결정합니다.
35절을 얼버무리거나, 35절로 회중을 겁주는 설교
마지막 절은 어느 전통에서도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구원의 상실을 뜻하는지, 용서받은 사람의 마땅한 열매를 뜻하는지를 두고 교단마다 강조가 다릅니다. 이 절을 아예 읽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반대로 이 절만으로 설교를 마무리해 은혜를 조건으로 바꿔 버리는 것도 본문을 놓치는 길입니다. 목사님이 속하신 전통의 이해를 따르되, 그 절이 27절과 어떻게 함께 서는지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예화가 본문을 대신하는 설교
용서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많고, 이 본문은 그런 예화를 부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화가 길어지면 회중이 기억하는 것은 임금과 종이 아니라 예화 속 인물이 됩니다. 비유 자체가 이미 이야기이므로, 예화는 본문의 한 장면을 밝히는 데 그쳐야 하고 본문보다 길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하신 뒤 스스로 물을 다섯 가지
- 녹음에서 27절, 곧 임금이 빚을 탕감하는 장면을 다루는 데 몇 분을 쓰셨고, 28-30절의 종의 잘못을 다루는 데 몇 분을 쓰셨는지요. 둘의 비율이 설교의 의도와 맞는지요.
-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를 회중이 실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말로 옮기셨는지요, 아니면 큰 빚과 작은 빚이라는 말로만 지나가셨는지요. 그 대목을 녹취록에서 찾아 읽어 보실 수 있는지요.
- 35절을 읽으셨는지요. 읽으셨다면 그 절에 대해 몇 문장을 말씀하셨고, 그 문장들이 27절의 탕감과 연결되었는지, 아니면 따로 떨어진 경고로 남았는지요.
- 용서가 관계 회복이나 화해와 어떻게 다른지, 또는 같은지를 한 번이라도 구분해 말씀하셨는지요. 상처를 안고 앉아 있는 성도가 이 설교를 듣고 가해자와 다시 만나야 한다고 느꼈을 문장이 있는지요.
- 설교의 적용 대목에서 회중에게 용서하라고 하셨는지, 아니면 이번 주에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지요. 후자라면 그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녹취록에서 한 문장으로 옮겨 적으실 수 있는지요.
적용이 붕 뜨지 않게
이 본문의 적용은 대개 용서합시다로 끝나는데, 그것은 방향이지 행동이 아닙니다. 회중이 이미 동의하는 방향을 다시 말하는 것은 적용이 아니라 요약입니다. 이 본문에 맞는 적용은 종이 나가서 동료를 만난 28절처럼, 예배당을 나간 뒤 실제로 마주칠 한 사람과 한 장면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 이번 주에 시간을 내어, 내가 마음속으로 셈하고 있는 사람 한 명의 이름과 그가 나에게 진 빚이 무엇인지를 종이에 적어 보고, 그 옆에 내가 하나님께 탕감받은 것을 적어 나란히 놓아 보십시오.
- 오래 연락을 끊은 사람에게 화해를 청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위해 매일 한 번씩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일을 다음 주일까지 이어가 보십시오.
- 가까운 가족이나 동역자에게 내가 붙들고 있던 작은 일 하나를 골라, 이번 주 안에 그 일은 이제 잊기로 했다고 직접 말로 전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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