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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3편

시편 73편 설교 — 악인의 형통, 그리고 성소에 들어가기까지

시편 73편은 성도가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말을 시인이 대신 해 주는 본문입니다. 악인은 잘되고 나는 하루 종일 재앙을 당한다는 그 고백을 회중 가운데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분이 앉아 있기에, 이 본문은 설교자에게 답을 서두르지 말고 시인이 걸어간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 달라고 조용히 요구합니다. 설교 뒤에 녹음을 놓고 스스로 점검하시려는 목사님을 위해 Preaching Lab이 이 페이지를 정리했습니다.

본문 한눈에

  1. 1절은 결론을 먼저 놓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하시다는 고백인데, 2절에서 곧바로 그 고백이 거의 무너질 뻔했다고 시인은 인정합니다.
  2. 3절부터 12절까지 시인은 악인의 형통을 길게, 거의 부러움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그립니다.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살이 찌고, 교만이 목걸이가 되고, 입은 하늘을 대적하는데도 사람들이 그들을 따릅니다.
  3. 13절부터 16절은 시인 자신에게로 시선이 돌아옵니다.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한 것이 헛되다는 탄식과, 그렇게 말하면 주의 아들들의 세대를 배신하는 것이라는 자각 사이에서 그는 생각해 보아도 답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4. 17절이 본문의 경첩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논증이 아니라 자리가 바뀐 것입니다. 18절부터 20절은 그 자리에서 다시 본 악인의 실상, 즉 미끄러운 곳에 선 자들과 깨는 자의 꿈같은 존재를 그립니다.
  5. 21절부터 28절은 시인 자신을 다시 봅니다. 자기가 짐승 같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다고 말하고,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있으며 땅에서도 주밖에 사모할 이가 없다는 고백에 이릅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말로 1절의 선하심을 새롭게 정의하며 닫힙니다.

설교가 갈 수 있는 길 셋

탄식을 끝까지 들어주는 설교

3절부터 16절까지를 서둘러 넘기지 않고, 악인의 형통이 성도의 신앙을 실제로 흔든다는 사실을 강단에서 정직하게 인정하는 방향입니다. 시인이 그 고백을 회중 앞에 남겨 두었다는 것 자체가 그런 마음이 죄가 아니라 신앙의 한 계절임을 말해 줍니다. 이 방향은 설교자가 17절 이후를 위로로 서두르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하고, 전반부의 시간 배분이 실제로 길어야 설득력이 생깁니다.

성소에서 시선이 바뀌는 설교

17절을 중심에 두고, 시인의 질문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서 있는 자리가 바뀌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방향입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와 공동체가 있는 곳이고, 거기서 악인의 종말과 자신의 처지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 방향은 성소를 오늘의 무엇으로 읽을 것인지, 곧 예배인지 말씀인지 성도의 교제인지를 설교자가 분명히 정해야 하며, 예배 참석을 문제 해결의 기계처럼 만들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복의 정의가 바뀌는 설교

1절의 선하심이 28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으로 다시 정의되는 구조를 따라, 시편 전체가 복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우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방향입니다. 25절과 26절의 고백, 곧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라는 말이 이 방향의 절정입니다. 이 방향은 자칫 형통에 대한 갈망 자체를 정죄하는 쪽으로 기울기 쉬우므로, 시인이 그 갈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져갔다는 점을 함께 지켜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흔히 어긋나는 자리

17절로 너무 빨리 건너뜀

3절부터 16절까지를 문제 제기 정도로 짧게 요약하고 곧바로 성소로 가는 설교가 많습니다. 그러면 회중 가운데 실제로 악인의 형통 앞에서 흔들리는 성도는 자기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정답을 들은 셈이 됩니다. 시인이 열네 절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면 설교도 그만큼 머물 이유가 있습니다.

악인의 종말을 통쾌함으로 끌고 감

18절부터 20절을 악인이 결국 망한다는 보복의 위안으로 읽으면, 시편이 22절에서 자기를 짐승 같았다고 고백하는 방향과 어긋납니다. 시인은 성소에서 악인의 종말만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실상도 보았습니다. 악인이 누구인지 회중이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떠올리게 만드는 예화는 특히 이 본문에서 위험합니다.

성소를 출석의 문제로 바꿈

17절을 예배에 빠지지 말라는 권면으로 곧장 옮기면, 본문이 말하는 시선의 전환이 교회 출석이라는 행위로 축소됩니다. 시인은 성소에서 무언가를 했다기보다 무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매주 예배에 나오면서도 13절의 마음을 품고 있는 성도에게 그런 적용은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설교하신 뒤 스스로 물을 다섯 가지

  1. 3절부터 16절까지의 탄식을 다루는 데 실제로 몇 분을 쓰셨고, 17절 이후에는 몇 분을 쓰셨는지요. 녹음에서 시간을 재어 보시면 전반부가 문제 제기용 도입으로 줄어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13절의 고백, 곧 마음을 깨끗하게 한 것이 헛되다는 말을 설교자의 목소리로 회중을 대신해서 말씀해 주신 대목이 있었는지요, 아니면 시인의 잘못된 생각으로만 소개하셨는지요.
  3. 17절의 성소를 오늘의 무엇이라고 설명하셨는지요. 예배, 말씀, 성도의 교제, 기도 가운데 어느 것인지 녹취록에서 한 문장으로 찾을 수 있는지, 아니면 여러 가지를 나열하고 넘어가셨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4. 22절의 자기 고백, 곧 내가 짐승 같았다는 말을 설교에서 다루셨는지요. 악인의 종말(18-20절)에 쓴 시간과 시인 자신의 회개(21-22절)에 쓴 시간을 비교해 보시면 설교의 무게가 어느 쪽에 실렸는지 드러납니다.
  5. 설교 안에서 악인의 예로 든 인물이나 상황이 있었다면, 회중이 그것을 특정 정치 진영이나 이웃이나 교회 안의 누군가로 들을 여지가 있었는지 녹취록에서 그 대목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적용이 붕 뜨지 않게

이 본문에서 떠 있는 적용은 하나님만 사모하자,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자 같은 방향 제시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옳지만 성도가 월요일에 무엇을 할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착지한 적용은 시인이 실제로 한 일, 곧 부러움을 숨기지 않고 말한 것과 성소라는 자리로 몸을 옮긴 것과 28절의 고백을 입으로 한 것 가운데 하나를 이번 주에 해 볼 수 있는 크기로 잘라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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