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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44

요한복음 11장 설교 — 무덤 앞에서 우시고, 무덤을 향해 외치신 예수님

요한복음 11장은 장례식과 부활절, 그리고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위한 주일에 가장 자주 오르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만큼 회중은 이미 결말을 알고 앉아 있고, 설교자는 익숙한 이야기가 다시 낯설어지도록 본문의 굴곡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됩니다. 설교를 마친 뒤 녹음을 놓고 점검하시는 일에는 Preaching Lab이 함께할 수 있습니다.

본문 한눈에

  1. 1-6절에서 자매의 전갈이 도착하지만 예수님은 사랑하시면서도 이틀을 더 머무시고, 이 지체가 본문 전체에 걸린 질문이 됩니다.
  2. 7-16절에서 제자들은 유대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음을 밝히시며 도마의 말로 죽음의 그림자가 예수님 자신에게도 드리워집니다.
  3. 17-27절에서 마르다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고백하지만, 예수님은 그 부활을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서 계신 자기 자신으로 옮겨 놓으시고 마르다는 27절의 고백에 이릅니다.
  4. 28-37절에서 마리아는 마르다와 똑같은 말을 하며 발 앞에 엎드리고, 예수님은 설명 대신 깊이 격동하시며 우십니다.
  5. 38-44절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옮기게 하시고, 아버지께 기도하신 뒤 큰 소리로 부르시며, 나온 나사로를 사람들에게 풀어 주라고 맡기십니다.

설교가 갈 수 있는 길 셋

지체하시는 사랑 — 5절과 6절 사이

본문은 사랑하셨다는 말과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말을 한 호흡에 붙여 놓습니다. 이 방향은 응답이 늦어지는 성도의 실제 경험을 정면으로 다룰 수 있는 길이지만, 4절과 15절과 40절이 말하는 목적을 본문에서 직접 보여 주어야 하고, 지체가 언제나 더 큰 기적으로 끝난다는 공식으로 흐르지 않도록 21절과 32절의 상실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마르다의 신학이 옮겨지는 자리

마르다는 24절에서 이미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교리를 고치신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을 마지막 날에서 지금 눈앞의 인격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이 방향은 25-26절을 설교의 중심 대지로 세우기에 좋으나, 회중이 이미 외우고 있는 구절이라 26절 끝의 질문이 실제 질문으로 들리도록 마르다의 대답까지 끌고 가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우시는 예수 — 33절에서 44절까지 한 덩어리로

표준 주석들이 흔히 짚듯 33절과 38절의 표현은 슬픔만이 아니라 분노에 가까운 격동을 담고 있어서, 예수님이 죽음 자체를 원수로 대하신다는 방향으로 설교할 수 있습니다. 다만 35절에서 멈추면 위로의 설교로는 따뜻하지만 본문이 아닙니다. 우신 분이 곧 무덤을 향해 외치신 분이라는 점까지 가야 하고, 그러려면 눈물의 시간과 부르심의 시간에 설교 분량을 어떻게 나눌지를 미리 정하셔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흔히 어긋나는 자리

상실 예화가 본문을 밀어내는 경우

이 본문은 설교자 자신의 장례 경험이나 교우의 사연을 끌어오기 쉽고, 그 예화는 대개 회중을 울립니다. 문제는 예화가 끝난 뒤 본문으로 돌아오는 다리가 없어서, 회중이 기억하는 것은 나사로가 아니라 예화의 주인공이 되는 일입니다. 예화 하나에 쓴 시간이 25-27절을 다룬 시간보다 길다면 순서를 다시 보셔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마르다와 마리아를 이 본문에 덧씌우는 경우

일하는 마르다와 앉아 듣는 마리아라는 대비는 누가복음의 것이지 여기의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마르다가 먼저 달려 나가 가장 높은 고백을 하고, 두 자매는 21절과 32절에서 정확히 같은 말을 합니다. 성격 유형론을 들여오면 27절의 고백이 마르다에게서 나온다는 본문의 무게가 사라집니다.

믿음이 충분하면 죽은 것도 살아난다는 결론으로 가는 경우

40절을 조건문으로 읽어 회중의 믿음이 기적의 열쇠라고 말하면, 본문의 두 자매가 이미 믿고 있었다는 사실과 어긋나고, 상을 당한 성도에게는 믿음이 부족해서 잃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바로 이어지는 45-53절에서 이 기적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결의로 이어진다는 점을 한 번은 짚어 주어야 본문의 방향이 바로 섭니다.

설교하신 뒤 스스로 물을 다섯 가지

  1. 25-26절을 설교 중에 몇 번 언급하셨고, 그것이 24절 마르다의 마지막 날 신앙과 무엇이 다른지를 풀어 말한 문장이 녹취록에 한 번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2. 6절의 이틀 지체를 설명하실 때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한 문장으로 넘기셨는지, 아니면 4절과 15절과 40절 가운데 최소한 하나를 근거로 대셨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3. 설교자 본인이나 교우의 상실 예화에 쓰신 시간이 몇 분이었고, 그 예화가 끝난 직후 본문의 절 번호로 돌아오는 문장이 있었는지 시간을 재어 보십시오.
  4. 21절과 32절에서 두 자매가 같은 말을 한다는 점을 언급하셨는지, 그리고 그 말에 예수님이 변명이나 설명으로 답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말로 하셨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5. 설교 마지막 5분의 동사들을 적어 보십시오. 믿읍시다, 소망을 가집시다 같은 방향만 있었는지, 아니면 39절이나 44절처럼 사람에게 맡겨진 일에서 나온, 이번 주에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었는지 세어 보십시오.

적용이 붕 뜨지 않게

이 본문에서 방향만 있는 적용은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가지자, 주님을 믿자로 끝나는 것이고, 회중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월요일에 할 일이 없습니다. 본문 안에는 예수님이 사람에게 시키신 일이 둘 있습니다. 돌을 옮기라는 것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는 것인데, 둘 다 기적이 아니라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착지한 적용은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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