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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 마태복음 21:1-11 · 누가복음 19:28-44 · 스가랴 9:9 · 빌립보서 2:5-11

종려주일 설교 —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 환호와 눈물 사이에서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의 문이라 한 해 중 회중의 기대가 가장 또렷한 주일이면서, 동시에 강단이 가장 쉽게 축제 하나로 미끄러지는 주일입니다. 본문들은 환호를 기록하되 그 환호 한가운데서 우시는 왕을 함께 보여 주고, 그래서 설교자에게 조용히 한 가지를 요구합니다. 부활절을 미리 당겨 오지 말고, 이번 주가 금요일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회중이 알고 돌아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설교 뒤에 녹음을 다시 들어 보실 때 이 페이지의 다섯 질문이 그 점검의 손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한눈에

  1. 마태복음 21:1-11은 예수님이 제자 둘을 보내 나귀를 끌어오게 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마태는 그 일을 스가랴 9:9의 성취로 못 박아 이 입성이 우연이 아니라 왕이 스스로 고른 방식임을 분명히 합니다.
  2. 무리는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시편 118편의 말로 외치는데, 호산나는 본래 구원하소서라는 간구이지 찬양의 감탄사가 아니어서, 환호와 탄원이 한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3. 누가복음 19:41-44에서는 같은 길 위에서 예수님이 도시를 보고 우시며 평화의 일을 알지 못한 성의 결말을 말씀하시고, 이 눈물이 종려주일 본문 가운데 가장 자주 빠지는 대목입니다.
  4. 스가랴 9:9-10은 나귀 탄 왕이 병거와 활을 끊고 열방에 화평을 선포한다고 하여, 겸손이 약함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통치임을 미리 말합니다.
  5. 빌립보서 2:5-11은 이 한 주 전체의 틀이 되어, 자기를 비우신 분이 곧 높아지신 분이라는 것을 회중이 금요일과 주일을 함께 붙들도록 도와줍니다.

설교가 갈 수 있는 길 셋

스스로 택하신 왕의 방식 — 스가랴 9:9-10을 따라

예수님이 나귀를 고르신 것은 겸손의 연출이 아니라 어떤 왕인지에 대한 선언이며, 스가랴 9:10이 그 왕이 전쟁 도구를 끊고 화평을 말한다고 이어 갑니다. 이 방향은 회중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의 모양과 그분이 가져오시는 구원의 모양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묻게 합니다. 대가는 스가랴 9:9만 인용하고 10절을 놓치지 않는 것, 그리고 겸손을 성품 이야기로 줄이지 않고 통치의 방식으로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환호 한가운데서 우시는 왕 — 누가복음 19:41-44

누가는 축제의 소리 곁에 눈물을 놓고, 그 눈물의 이유를 평화의 일을 알지 못함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함이라고 적습니다. 이 방향은 회중을 구경꾼이 아니라 찾아오심을 받은 성의 자리에 세우며, 종려주일을 감상이 아니라 기회의 날로 만듭니다. 대가는 43-44절의 심판 말씀을 부드럽게 넘기지 않는 용기이고, 동시에 그 말씀을 회중 위협으로 쓰지 않고 우시는 분의 마음 안에서 읽는 절제입니다.

비우심에서 높아지심까지 — 빌립보서 2:5-11로 한 주를 열기

종려주일에 빌립보서 2장을 여는 것은 고난주간 전체의 지도를 회중 손에 쥐여 주는 일이어서, 금요일의 낮아지심과 주일의 높아지심이 한 흐름임을 미리 보게 합니다. 이 방향은 입성 장면을 자세히 다루지 않아도 되는 대신, 나귀 탄 왕과 종의 형체를 한 문장으로 잇는 일을 설교자가 해내야 합니다. 대가는 5절의 권면 때문에 본문을 본받으라는 윤리로만 읽고 9-11절의 하나님의 행위를 흐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흔히 어긋나는 자리

호산나에서 못 박으라까지, 무리의 변덕을 꾸짖는 설교

닷새 뒤 같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외쳤다는 대비는 강렬하지만, 마태복음 21:11의 무리는 갈릴리에서 올라온 순례자들이고 27:20의 무리는 대제사장들에게 설득된 사람들이어서 본문이 동일 인물임을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이 도식에 기대면 설교는 회중의 신앙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다그치는 자리로 흘러가고, 그런 무리를 향해 스스로 오신 왕이라는 복음이 뒤로 밀립니다. 대비를 쓰시더라도 본문이 말하는 만큼만 말하고, 결론이 꾸짖음이 아니라 오심에 놓이는지 보십시오.

부활절 예고편이 되어 눈물을 건너뜀

종려주일을 잔치로만 다루면 누가복음 19:41-44이 통째로 빠지고, 회중은 예루살렘의 축제에서 곧장 다음 주일의 빈 무덤으로 건너뛰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주간이 설교 안에서 사라지고, 성금요일이 왜 있어야 하는지를 회중이 모르는 채 돌아갑니다. 축제 본문을 택하셨더라도 우시는 대목이나 금요일을 한 번은 정면으로 세워 두는 것이 이 날의 몫입니다.

나귀 알레고리와 정치적 메시아 도식이 본문을 대신함

나귀처럼 주님을 태우는 도구가 되자는 예화, 또는 당시 유대인은 정치적 메시아만 바랐고 우리는 영적 메시아를 안다는 대조는 익숙하지만 본문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태는 나귀에서 스가랴를 보라고 하지 우리 자신을 보라고 하지 않으며, 스가랴 9:10의 화평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정치와 영성의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예화가 본문을 설명하는지, 아니면 본문 자리를 차지했는지 녹음에서 시간을 재 보시면 드러납니다.

설교하신 뒤 스스로 물을 다섯 가지

  1. 스가랴 9:9을 인용하셨다면 10절까지 이어 가셨는지요. 녹취록에서 병거, 활, 화평, 열방 같은 10절의 낱말이 한 번이라도 나오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2. 호산나라는 말이 설교에 몇 번 나오는지, 그중 구원하소서라는 간구의 뜻을 밝힌 자리가 있는지, 아니면 전부 찬양의 감탄사로만 쓰였는지 세어 보십시오.
  3. 누가복음 19:41의 눈물이 설교 몇 분 지점에서 나왔는지, 거기에 몇 분을 쓰셨는지, 혹은 아예 언급되지 않았는지 녹음으로 확인해 보십시오.
  4. 그때 그 무리와 오늘 우리를 잇는 문장이 몇 번 나오는지, 그중 몇 번이 우리도 그렇게 변덕스럽다는 꾸짖음이고 몇 번이 그런 우리를 향해 오신 왕이라는 선포인지 나누어 세어 보십시오.
  5. 마지막 3분에서 회중을 어디로 보내셨는지요. 다음 주일이나 부활만 언급되었는지, 아니면 금요일, 십자가, 고난주간이라는 말이 한 번이라도 결론 안에 있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적용이 붕 뜨지 않게

종려주일 설교의 적용은 겸손하게 살자, 참된 왕을 맞이하자에서 멈추기 쉬운데, 그것은 방향이지 행동이 아니어서 회중이 주차장에 도착하기 전에 흩어집니다. 자리에 내려앉은 적용은 이 한 주가 고난주간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통과하게 하는 것이어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지가 문장 안에 들어 있습니다. 본문이 왕의 오심과 성의 알지 못함을 다루니, 적용도 찾아오심을 알아차리는 구체적인 시간과 자리를 정해 주는 쪽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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